“세습: 한 집안에서 후손에게 신분, 재산, 직업 등을 세대에 걸쳐서 물려주는 행위 - 나무위키”
요즘 “세습”이라는 말을 꺼내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눈길을 받는다. 그런데 AI가 노동 시장을 재편하는 지금, 나는 이 말을 다시 꺼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진입로가 막히고 있다
올해 2월, Citrini Research가 발표한 보고서 하나가 미국 증권 시장을 흔들었다. “글로벌 인텔리전스 크라이시스” — 2028년 6월의 시점에서 쓰인 가상 경제 붕괴 시나리오다. 흥미로운 건 AI의 실패가 아니라, AI의 성공이 경제를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지식 노동자가 대거 소멸하고, 그들에게 의존하던 기업과 경제 전체가 연쇄 붕괴한다. 7천 단어짜리 가상 시나리오가 실제 주가를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시장이 이 가능성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다.
현실에서 이미 조짐이 보였다. 로펌은 주니어 변호사가 필요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컨설팅 펌에서는 조사와 덱 작업을 하던 주니어 컨설턴트와 인턴의 자리가 줄고 있다. 단순히 일자리가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다. 산업의 진입로 자체가 막히고 있다.
주니어는 단순 노동력이 아니었다. 시니어와 파트너를 키워내는 파이프라인이었다. 그 파이프라인이 지금 조용히 끊기고 있다.
누가, 어떻게 신입을 육성하나
미래 산업의 경쟁력이 AI로 무장한 인력으로부터 온다면, AI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오히려 가장 강력한 후보다. 문제는 이들이 성과를 내려면 기업과 산업의 기본 원리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직의 생리가 무엇인지, 고객 가치가 어디서 만들어지는지 — 그런데 그것을 배울 진입로 자체가 처음부터 막혀 있다.
기업은 이들을 가르칠 동기가 없다. 당장 기존 인력에 AI를 붙이는 게 더 빠르고 싸다. 기업들은 기존 인력을 해고하기보다는 신규 채용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력을 줄여나가고 있다. 학교나 공공은 현장을 모른다.
그런데, 이들 신입을 교육시켜야할 강력한 동기를 가진 이들이 있다. 바로 부모들이다.
세습을 재정의할 때다
십년 이상 경력의 직장인이라면 대부분 엄청난 경험과 노하우를 갖고 있다. 어디서 비효율이 생기는지, 어떤 관행이 실제 작동하거나 혹은 아무 이유 없이 유지되는지, 고객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들은 AI 시대 큰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자산들이다.
일반 직장인들에게는 이러한 기회를 적극적으로 가치로 구현하기 위한 동기와 AI 노하우가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직장인이 취준생이나 사회 초년생의 부모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방송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한 베테랑이 준 비즈니스 노하우를 가지고, 그의 딸이 새로운 AI 솔루션을 만들었다. 대형 쇼나 콘서트 촬영 현장에서는 수십 대의 카메라가 돌아간다. 어떤 카메라가 언제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 — 이 시나리오를 짜고 실시간으로 조율하는 일은 주니어 작가와 PD 여럿이 달라붙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이것이 AI 시대의 세습이다. 돈도 인맥도 아니다. 산업을 보는 눈, 가치가 어디서 만들어지는지 아는 감각을 물려주는 것이다.
당신이 수십 년간 쌓아온 그 노하우 — 지금 누구에게 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