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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장 — 균형을 잡으라는 사람에게, 균형을 잡을 도구가 없다

피터 드러커 《매니지먼트》 44장. 설계 논리와 설계 명세

들어가며

“그럼 당신이 광고 매출 책임질 수 있나?”

CJ ENM에서 전사 전략기획을 맡고 있을 때 TV 부문장에게 들었던 말이다. 한동안 이 한마디는 내게 변화에 저항하는 리더의 전형으로 기억됐다. IP 중심의 사업 전환을 주장하는 나에게,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는 부문장의 반응. 나는 그것을 사람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드러커의 44장을 읽으며 뒤늦게 깨달은 것이 있다. 그는 틀리지 않았다. 자기가 앉은 구조 안에서, 그는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반응했을 뿐이다. 문제는 그가 아니라 그 구조였고, 더 정확히는 그 구조의 균형을 잡아야 했던 자리(나의 역할)에 있었다.

이번 장이 던지는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조직 구조가 갖춰야 할 7가지 요건의 균형을 잡아야 할 사람에게, 정작 균형을 잡을 도구가 주어져 있는가.

조직의 유형은 정해져 있다, 그 속의 균형은 그렇지 않다

이 장은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조직 구조의 다섯 가지 유형—기능 구조, 팀 구조, 연방제 분권, 의사 분권, 시스템 구조. 다른 하나는 어떤 유형을 선택하든 구조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7가지 요건이다. 명확성에서 시작해 지속성과 자기혁신까지, 조직이 살아 있기 위해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조건들이다. (자세한 내용은 글 말미 참조)

읽기 전에는 다섯 가지 유형의 장단점이나 선택 기준이 다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드러커는 이 유형 선택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달았다. 딱 맞는 답은 없다. 세 가지 논리—일의 흐름, 성과 책임, 관계—중 어느 것이 더 강하게 요구되는지를 보고 고르는, “가장 덜 나쁜 선택”에 가깝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대부분의 경영자는 구조 유형을 처음부터 설계할 기회가 없다는 점이다. 연말 조직개편이 빈번해도, 기능 조직을 팀 구조로 바꾸는 것과 같은 유형 자체의 변화는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실제 과업은 구조의 선택이 아니다. 이미 선택된 구조가 지금의 전략을 제대로 지탱하고 있는지를, 7가지 요건의 균형을 통해 끊임없이 점검하는 일. 그것이 현실 경영자의 일이다.

그런데 이 요건들을 동시에 모두 충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요건들은 서로 싸운다. 하나를 강하게 만들면 다른 하나가 약해진다.

이 균형은 누가,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이번 토론은 그 질문을 따라갔다.

명확성의 역설: 잘 설계된 구조가 변화를 가로막는다

CJ ENM은 여섯 개의 사업부문이 각자의 손익을 책임지는 연방제 구조였다. 각 사업부문 안에서는 기능 조직과 프로그램 팀이 함께 작동했다. TV 부문을 예로 들면, 연출·세일즈·마케팅이라는 기능 조직이 있었고, 프로그램 하나가 시작되면 이들이 모여 팀을 꾸렸다. 드러커가 말한 기능 구조와 팀 구조의 보완이 실제로 작동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 구조는 명확성 측면에서 잘 설계되어 있었다. 프로그램 팀의 목표는 단순했다. 최고의 시청률을 만드는 것.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의사결정 경로도 분명했다. 드러커가 말하는 명확성의 교과서적 사례에 가까웠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시작됐다.

당시 나는 TV 광고 매출 중심의 수익 구조를 IP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고 시장은 정체되어 있었고, 넷플릭스와 같은 플랫폼의 확산으로 콘텐츠 IP의 글로벌 가치는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사업의 무게중심을 옮길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TV 부문장의 반응은 이랬다. “그럼 당신이 당장 TV 광고 매출 책임질 수 있나.”

나는 한동안 그것을 사람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변화에 저항하는 리더, 기득권을 지키려는 부문장.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자신의 구조 안에서 완전히 합리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KPI가 시청률과 광고 매출에 묶여 있는 한, 그에게 IP 전환은 자기 성과를 스스로 갉아먹는 요구였던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명확성이라는 조직 구조의 요건이 만들어낸 역설이다. 명확성은 좋은 조직의 조건이다. 그런데 명확성이 강할수록, 구조적 변화를 만들기는 더 어려워진다. 자기 KPI가 분명할수록, 그 KPI에 들어맞지 않는 요구는 합리적으로 거부된다.

잘 설계된 명확성이, 변화의 시기에 전환을 막는 벽이 된다. 명확성을 강하게 세우면 적응성이 약해지고, 적응성을 강하게 세우면 명확성이 흔들린다. 둘 다 필요하지만, 둘이 동시에 100점이 되는 구조는 없다.

결국, 전략이 바뀌는 시점에 필요한 것은 잠시 명확성을 흔들 수 있는 권한이다. 누군가는 KPI를 다시 짜고, 평가 기준을 바꾸고,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명확성과 적응성 사이의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그 권한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부터 진짜 문제가 시작됐다.

균형을 잡을 도구가 흩어져 있다

나는 IP 중심으로의 새로운 전사 전략을 제안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KPI를 바꿀 권한이 없었다. 부문장의 평가 기준에 IP 매출 비중을 넣고 광고 매출 비중을 낮추는 일, 그것은 인사와 재경의 영역이었다. 사업부문 간 자원 재배분은 사업관리의 영역이었다. 조직 구조 자체를 손볼 권한은 더더욱 없었다.

전략, 조직 설계, KPI 설정, 자원 배분—이 네 가지가 각각 다른 본부에 나뉘어 있었다.

이들이 한 경영자의 손에서 함께 움직여야 조직 요건들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가능해진다. 명확성을 잠시 흔들어 적응성을 회복하려면, 전략 방향과 KPI와 자원 배분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하나만 바뀌면 균형은 오히려 더 무너진다. 전략은 IP를 향하는데 KPI는 광고를 향하면, 부문장은 KPI를 따른다. 합리적인 선택이다.

균형을 잡아야 할 사람에게, 균형을 잡을 도구가 없었다.

전략, 조직 설계, KPI 설정, 자원 배분의 분산은 한국 대기업에서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다. 기업이 성장하면서 각 기능들은 더 전문화되는 경향이 있다. 역설적으로 기업의 성공은 분산의 정도를 더 키우고, 그럴수록 균형잡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흥미로운 반례가 토론에서 나왔다. 한 토론자는 과거 신사업 조직을 맡아 운영했던 시절의 경험을 현재와 대비하였다.

“그때는 내 마음대로 했었다. 자원은 형편없이 부족했다고 느끼는데도, 목적이 분명했고 그 목적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은 훨씬 더 큰 조직을 맡고 있고 더 많은 충원도 하는데, 사람 하나 뽑는 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

단순히 권한이 많아서 좋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균형을 스스로 잡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자원은 부족해도 도구는 한 손에 있었다.

권한이 분산되어 있으면 누구도 균형을 잡지 못한다. 물론 권한이 한 사람에게 너무 집중될 때 생기는 부작용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리해야 할 부작용이지, 그것을 이유로 도구 자체를 분산시킨다면 결국 아무도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

맺음말

조직은 스스로 균형을 찾지 못한다.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도구를 손에 쥔 채로, 잡아야 한다. 어떤 조직 설계 원리도 완벽하게 7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없다. 균형은 끊임없이 다시 잡혀야 한다.

많은 기업들이 균형을 잡아야 할 사업 책임자에게는 균형을 잡을 도구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변화의 순간이 와도, 누구도 결정하지 못한다. 가장 합리적인 사람들이 모여 가장 비합리적인 정체를 만든다.

나는 한동안 CJ ENM의 그 부문장을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그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도구가 흩어져 있는 구조 안에서, 누구도 옳을 수 없었다. 나도, 그도, 우리 모두 자기 자리에서 합리적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지금 당신의 조직에서 누가 균형을 만들어내야 하는가. 그 손에 필요한 모든 도구가 주어져 있는가.

부록: 드러커가 말하는 조직 구조의 7가지 요건

어떤 유형을 선택하든 조직 구조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다. 이 7가지는 동시에 충족할 수 없으며, 전략과 환경에 따라 어느 것이 더 강하게 요구되는지가 달라진다. 균형의 대상이지, 체크리스트가 아니다.

  1. 명확성 (Clarity): 각 구성원이 자신의 위치, 역할, 의사결정 경로를 알아야 한다. 단순함과는 다르다. 고딕 성당은 복잡하지만 명확하고, 현대 오피스 빌딩은 단순하지만 오히려 길을 잃기 쉽다.
  2. 경제성 (Economy): 조직을 유지하는 데 투입되는 에너지를 최소화해야 한다. 내부 통제, 내부 소통, 인사 문제에 소비되는 노력이 클수록 실제 성과로 전환되는 에너지는 줄어든다.
  3. 비전의 방향 (Direction of Vision): 구성원의 시선이 노력이 아니라 성과를, 부분이 아니라 조직 전체를 향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4. 과업의 이해 (Understanding of Task): 개인은 자신의 과업과 조직 전체의 과업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5. 의사결정 (Decision-Making): 결정이 가능한 낮은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구조가 결정을 지연시키거나 잘못된 이슈에 집중하게 만들면 안 된다.
  6. 안정성과 적응성 (Stability and Adaptability): 안정성은 경직성이 아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어야 진정한 안정이다. 완전히 경직된 구조는 결국 부서진다.
  7. 지속성과 자기혁신 (Perpetuation and Self-Renewal): 조직은 내부에서 차세대 리더를 키워낼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